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역사적 의의 == 동로마 제국은 천년에 가까운 존속 기간 동안 동방에서는 [[아랍]], [[튀르크]],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스]]와 항시 대치하는 도중 때때로 동맹 아닌 동맹의 얼굴로 옆구리를 찔러 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십자군]] 같은 프랑크-라틴계 세력 같은 수 많은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적대한 모든 세력들에게 뿌리 깊은 영향력과 유산을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북방 국경을 수백 년에 걸쳐 유린하고 간혹 콘스탄티노폴리스 대문을 두들기기도 했던 [[루스]]족과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같은 슬라브계 공국들과 현대 [[루마니아]]의 중세적 모태인 블라흐족, [[캅카스]] 산맥 오지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조지아]]는 동로마를 괴롭히면서도 그 문화력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뿌리까지 깊게 감화되어 정교회를 받아들이고, 차츰 교회 자치권을 인정받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의 정교회들은 그 민족들이 400년이 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 원동력이자 민족적 자의식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나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성인들이 고안한 [[키릴 문자]]를 문자로 삼았으며, 동로마 제국이 쇠락해 가고 결국 멸망하자 그 직접적인 후계자를 자처하며 끝끝내 [[제정 러시아]] 시절까지 가서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정교회의 세속적 수호자라는 동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까지 그대로 답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망하는 날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을 국가적 사명으로 천명했다.[* 물론 러시아에게는 이런 명분, 이데올로기적 이유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짜리그라드 '수복' 을 추구할 이유가 충분했다. 예를 들어, [[흑해]] 연안 국가인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스탄불과 그 주변을 확보한다는 것은 곳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확보한다는 뜻이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확보한다는 것은 곧 유럽 전체와 연결된 지중해로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반쯤은 호수나 다름없는 흑해와 고대부터 현대까지 유럽 문화권의 중심 중 하나인 지중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의 통제권만 생각해도 국운을 건 전쟁을 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까지 진격하여 결국 황제의 도시 자체마저 낼름하는 것은 결코 그럴듯한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아니라 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작계까지 있었던 실질적인 대 오스만 전쟁과 남진 정책의 최종적인 목표였고, 현실적인 구상이었다. 물론 코스탄티니예 점령을 눈앞에 두었던 러시아의 뒤통수를 베를린 회담이라는 이름으로 후려갈긴 비스마르크에게 러시아는 피꺼솟했고, 이는 러시아의 1차대전 참전을 부른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도 제국을 공격할 때는 공격하더라도 이들의 문화적 광휘, 황제적 권위, 제도의 세련됨에 깊게 감화받아 로마 황제의 계승을 천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와 [[아토스 산]]의 수도회 조직 또한 유지하며 건축, 통치 기관, 국가적 이데올로기 등 많은 면에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켰고, [[셀리미예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등이 상징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건축 양식을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쇠망에 치명적인 기여를 한 베네치아 공화국도 그 기원은 상술했다시피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고, 통수를 칠 때는 치더라도 공화국 내부적으로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모습이 보여주듯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예술적 찬란함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동유럽, 이슬람 세계의 관점에서 이들이 더 오래 보았고,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문명사적 관점에서 받아먹은 빚이 많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서로마보다 천 년을 더 오래 간 이 동로마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정교회]]에서 동로마의 유산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구심점이자 '''문명과 종교의 어머니'''였고, 이후로도 수백 년에 걸쳐 정교회권 지도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천명하게 만든 거대한 역사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